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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지훈의 또다른 화두, 지조론

The poet Ji-Hun's personal motto, integrity

1950년대 말기,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민족의 내부적 통합을 이끌러 나가야 할 중요한 시점에서, 집권 자유당은 정권 연장에만 집착하는 반민주주의적 모습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정치현실은 극도로 혼란하고 부패가 만연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정치 현실 속에서 과거의 친일파들은 지난날의 과오에 대한 뉘우침이 없이 정치 일선에 나섰고, 정치 지도자들마저 신념이나 지조 없이 시대상황에 따라 변절을 일삼았다. '지조론'은 이러한 세태를 냉정한 지성으로 비판한 글이다.

지조란 것은 순일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기도 하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다.
자기의 명리(名利)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와 추종자를 하루아침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 '지조론' 중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 Nobleaae Oblige

일제강점기와 독재시대를 살아온 조지훈은 시인으로서, 국학자로서 또한 당대의 논객으로서 지조를 지키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지식인과 문인들이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행위에 가담하였지만, 지훈은 절필을 할망정 결코 친일을 하지는 않았다. 광복 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한국문학가협회의 창립위원으로 활동했고, 한국시인협회 대표 간사를 지냈으며, 한국시인협회 회장과 한국신시 60년 기념사업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문단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지훈은 학자로서 국학연구에 전력을 다하였고, 지조를 중히 여기는 참다운 선비로서 세상을 향해 쓴 소리와 곧은 소리를 터뜨리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고, 교양인의 것이며 모름지기 지성인이라면 누구나 갖추고 있어야 하는 최고의 덕목"
"시인은 정의를 위하여는 원수 앞에 총칼을 들고 병정과 같이 용감하고 잔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인은 승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비루(鄙陋)한 수단도 가리지 않는 자가 아니요,
이기는 것만으로 영광을 삼지 않고, 패자로서도 영광을 누리고 역사 앞에 개가(凱歌)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 '지조론' 중에서

전통적 운율로 선의 미학을 노래하다.

1920년 경북 영양에서 출생한 지훈은 본관이 한양(漢陽)이고 본명은 동탁(東卓)이다. 1393년 문장지(文章誌)에 《고풍의상, 古風衣裳》이 추천되면서 문단에 나온 그는 소월과 영랑에서 비롯하여 서정주와 유치환을 거쳐 청록파에 이르는 한국 현대시의 주류를 완성함으로써 20세기의 전반기와 후반기의 한국문학사에 연속성을 부여해 준 큰 시인이다.《청록집》,《풀잎단장》,《조지훈시선》,《역사 앞에서》,《여운》등 그가 남긴 시집들은 모두 민족어의 보석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특히 《승무》, 《낙화》, 《고사》와 같은 시들은 지금도 널리 읊어지고 있는 민족시의 명작들이다. 전통적인 운율과 선(禪)의 미학을 매우 현대적인 방법으로 결합한 것이 조지훈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조지훈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느 누구도 훼손하지 못할 만큼 확고부동하다.

지조있는 선비로서 한국학 명저들을 남기다

또한 매천 황현과 만해 한용운을 이어 조지훈은 지조를 목숨처럼 중히여기는 지사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한 일송 김동삼의 시신을 만해가 거두어 장례를 치를 때 심우장에 참례한 것이 열일곱(1937년)이었으니 조지훈이 뜻을 확립한 시기가 얼마나 일렀던가를 알 수 있다. 조지훈은 민속학과 역사학을 두 기둥으로 하는 한국문화사를 스스로 자신의 전공이라고 여기었다. 조부 조인석과 부친 조헌영으로부터 한학과 절의를 배워 체득하였고 혜화전문과 월정사에서 익힌 불경과 참선 또한 평생토록 연찬하였다. 여기에 조선어학회의 큰사전 원고를 정리하며 자연스럽게 익힌 국어학 지식이 더해져서 형성된 조지훈의 학문적 바탕은 현대교육만 받은 사람들로서는 감히 짐작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넓고 깊었다. 광복이 되자 10월에 한글학회 국어교본 편찬원이 되고 11월에 진단학회 국사교본 편찬원이 되어 우리 손으로 된 최초의 국어교과서와 국사교과서를 편찬하였고, 그 이후 1968년 기관지 확장으로 작고하기까지 조지훈이 저술한 《멋의연구》,《한국문화사서설》,《한국민족운동사》,《시의 원리》 등의 저서는 한국학 연구의 영원한 명저가 되었다.

지조론, 민족을 위한 양심 어린 절규

조지훈은 진리와 허위, 정의와 불의를 준엄하게 판별하고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엄격하게 구별하였다. [지조론]에 나타나는 추상 같은 질책은 민족 전체의 생존을 위해 도저히 참을 수 없어 터뜨린 양심의 절규였다. 일찍이 오대산 월정사 외전 강사 시절 조지훈은 일제가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행렬을 주지에게 강요한다는 말을 듣고 종일 통음하다 피를 토한 적도 있었다. 민족문화와 민주정치를 살리기 위하여 조지훈은 한 시대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진해 발언에 대해 이는 학자와 학생과 기자를 버리고 정치를 하려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한 조지훈은 그로 인해 정치교수로 몰렸고 늘 사직서를 가지고 다녔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 '지조론' 중에서

"태초에 멋이 있었다"

조지훈은 근면하면서 여유있고 정직하면서 관대하고 근엄하면서 소탈한 현대의 선비였다. 매천이 절명의 순간에도 "창공을 비추는 촛불"로 자신의 죽음을 관조하였듯이 조지훈은 나라를 잃은 시대에도 "태초에 멋이 있었다"는 신념을 지니고 초연한 기품을 잃지 않았다. 조지훈에게 멋은 저항과 죽음의 자리에서도 지녀야 할 삶의 척도였다. 조지훈은 호탕한 멋과 준엄한 원칙 위에 재능, 교양, 인품이 조화를 이룬 대인이었다.

담당부서
문화관광과 관광개발담당
임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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